김진곤金鎭坤
1890.7.13 ~ 1963.10.5 · 곤양면 송전리
사천에서 가장 먼저 만세를 부른 사람
곤양공립보통학교 학생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3일,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곤양주재소 안으로 던져 넣은 뒤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웃 진주보다 닷새 빨랐습니다. 그해 4월 태형 60대를 선고받았으나 검사가 항소했고,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로 형이 무거워졌습니다.
- 훈격
- 1995년 대통령표창
- 전거
-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관리번호 9730)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곤양면 만세운동」 GC09600450
유승갑 · 손계묵柳承甲 · 孫桂默
유승갑 1892.10.23 ~ 1960.3.2 / 손계묵 1893(추정) ~ 1919 · 사천면 두량리(현 사천읍 두량리)
길을 닦다 만세를 부른 두 사람 — 한 사람은 살아남고 한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다
같은 마을 사람이었고 같은 날 함께 앞장섰습니다. 1919년 4월 중순, 중선포 도로공사 부역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두 사람이 만세를 선창하자 인부들이 뒤따랐습니다. 학생도 유생도 아닌, 곡식이 떨어지는 봄에 끌려 나와 길을 닦던 사람들이 만든 시위였습니다. 헌병이 달려들어 여러 사람이 다쳤고, 유승갑은 태형 90대를 받았습니다. 손계묵은 붙잡힌 뒤 부산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훈격
- 손계묵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 / 유승갑 1998년 대통령표창
- 전거
-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 유승갑 편(14권)·손계묵 편(22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손계묵」 E0075896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중선포 만세운동」 GC09600453
이영근李永根
1894.5.11 ~ 1922.8.8 · 곤명면 금성리
태형 90대의 후유증으로 3년 뒤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나다
유림 출신입니다. 진주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금성서당 훈장 정원주, 이웃 문형근 등과 뜻을 모아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고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1919년 4월 5일 마을 앞 덕천강 강변에서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다 붙잡혔고, 5월 19일 태형 90대를 선고받았습니다. 매질의 후유증으로 앓다가 1922년 8월 8일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함께 만세를 부른 이규현도 태형 90대를 받았습니다.
- 훈격
- 1995년 건국포장 (이규현 2002년 대통령표창)
- 전거
-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9640)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곤명면 만세운동」 GC09600452
강금수姜金秀
1899.9.9 ~ 1969.6.13 · 삼천포 동리
2025년에야 이름을 찾은 사람
1919년 3월 25일 삼천포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소리 내어 읽고 청년들의 대열을 이끌었습니다. 붙잡혀 징역 7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고, 1925년에는 삼천포청년회 창립에 참여해 총무로 활동했다고 전합니다. 삼천포 만세운동 참가자 가운데 오랫동안 포상받은 사람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광복 80주년인 2025년에 그가 처음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습니다.
- 훈격
- 2025년 대통령표창
- 전거
-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관리번호 7609) / 뉴스사천 2025-08-14 news4000.com/55013 / 경남일보 2025-08-17 gnnews.co.kr/616574
최원형崔垣亨
1901.3.13 ~ 1945.2.8 · 서포면 맥사리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으로 내려온 학생 —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옥에서 숨지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고향으로 내려와 해인사에서 공부하던 최범술에게 전했습니다. 사천에 선언서가 들어온 통로였습니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 고향 친구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부탁하는 밀서를 보냈다가 밀고로 붙잡혔고, 1942년 징역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1945년 2월 8일 대전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였습니다.
- 훈격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 전거
-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112)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최원형」 GC09600856
최범술崔凡述 (효당 曉堂)
1904.5.26 ~ 1979.7.10 · 서포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곤명면 다솔사로 출가
열네 살 학인이 등사기로 찍어 낸 1만 장
1919년 해인사에서 공부하던 학생 신분으로, 최원형에게서 받은 독립선언서를 동학들과 함께 1만여 장 인쇄해 합천·의령·진주·사천·하동 일대에 배포했습니다. 뒤에 다솔사 주지가 되어 불교 강원과 광명학원을 열고,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만당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됐습니다. 광복 뒤에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냈고, 만년에는 원효 연구와 차 문화 복원에 힘썼습니다.
- 훈격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
- 전거
-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4634)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최범술」 GC09600851 / 부산역사문화대전 「범술」 GC04200508
조우제趙佑濟
1885.3.13 ~ 1946.8.5 · 곤양면 송전리(뒤에 진주로 이주)
최범술의 보통학교 시절 선생님
곤양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919년 3월 제자였던 최범술 등에게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진주의 만세운동을 함께 이끌고 선언서를 하동·사천·진주·남해로 퍼뜨렸습니다. 이후 진주청년회·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신간회 진주지회에서 활동했고, 1922년 소작노동자대회에서는 소작인의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1927년 대구에서 일어난 폭탄 의거에 연루되어 1년 4개월가량 옥고를 치렀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앓다가 194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 훈격
-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
- 전거
-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90769, 14권)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인명사전
하익봉河益鳳
1926.8.7 ~ 1945 · 삼천포 선룡리
열아홉에 세상을 떠난 독서모임 학생
진주공립중학교에 다니던 1943년 무렵, 친구들과 광명회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어 우리 역사를 함께 공부했습니다. 졸업하면 다 같이 독립군에 들어가자고 약속했습니다. 1944년 9월 진해비행장 건설 공사에 강제로 동원돼 일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우리말과 독립군 이야기를 전하다 헌병대에 붙잡혔습니다. 40일가량 갇혀 고문을 받은 뒤 부산형무소에 수감됐고, 1945년 봄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아홉이었습니다.
- 훈격
-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
- 전거
-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19권, 관리번호 961664) / 뉴스사천 「광명회,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다」 news4000.com/4332
문수열文洙烈
1923.7.15 ~ 2008.12.23 · 곤명면 금성리
그가 지킨 태극기가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되다
1944년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들어가 작전참모반에서 활동하고 기관지 『빛』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다른 부대로 옮기게 되자 함께 지내던 광복군 70명가량이 그의 태극기 여백에 이름과 글귀를 남겼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희생하자", "자주 자유 자애" 같은 글이 흰 여백을 채웠습니다. 이 태극기는 1986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됐고, 2008년 태극기로는 처음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됐습니다. 2026년 광복절에는 경상남도청과 사천시청 외벽에 이 태극기가 대형 현수막으로 걸렸습니다.
- 훈격
-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
- 전거
-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8131)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 뉴스사천 news4000.com/57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