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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독립운동 이야기

사천 사람들의 1919년

1919년 3월 13일, 곤양 장터에서 한 학생이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날부터 한 달 남짓 동안 사천의 장터와 학교 운동장, 강변과 도로 공사장에서 같은 외침이 이어졌습니다.

그때 사천은 큰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열 개 면이 있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논밭을 일구거나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 곳에서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다섯 개 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만세를 부른 사람들은 특별한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보통학교 학생, 장날 장터에 나온 사람들, 서당 훈장과 유생, 그리고 봄철에 강제로 끌려 나와 길을 닦던 인부들이었습니다.

백 년이 넘게 지나면서 어떤 일은 또렷하게 남았고 어떤 일은 흐려졌습니다. 이 페이지는 여러 기록이 일치하는 것과 한 곳에만 남은 것을 구분해 적었습니다. 날짜나 사람 수가 기록마다 다른 곳에서는 한쪽을 고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것도 이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의 출처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3·1운동」 GC09600448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일제 강점기」 GC0960043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천 3·1운동」 E0026011

11919년 봄, 사천

사천의 만세는 한 곳에서 시작해 옆 마을로, 또 옆 마을로 번졌습니다. 3월 13일 곤양에서 시작해 4월 중순 중선포까지, 장소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면 1곤양, 3월 13일: 사천에서 가장 먼저

헌병주재소 안으로 던진 태극기

사천에서 가장 먼저 만세를 부른 사람은 곤양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진곤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3일, 이웃한 진주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닷새 전이었습니다.

김진곤은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태극기를 손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헌병이 지키는 곤양주재소 안으로 던져 넣은 뒤, 곤양 장터로 나가 사람들을 모아 만세를 외쳤습니다.

붙잡힌 뒤 남은 판결문에는 그 밤의 장면이 더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3월 13일 밤 열 시쯤, 그는 기숙사에서 같은 학교 학생 박계술에게 종이와 붓을 빌려 태극기를 만들었고, 그것을 포플러나무에 묶은 뒤 2층으로 올라가 큰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고 판결문에 남아 있습니다.

김진곤은 그해 4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태형(볼기를 치는 형벌) 60대를 선고받았습니다. 검사가 형이 가볍다며 항소했고,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오늘날의 항소심 법원)은 판결을 뒤집어 징역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곤양면에서는 4월 6일과 4월 19일에도 만세시위가 이어졌습니다.

곤양 장터 — 사천에서 만세가 처음 터진 곳

장면 2사천읍, 3월 21일: 졸업식 날 축구장

약속보다 이른 만세

3월 21일은 사천공립보통학교, 지금의 사천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이미 준비를 마친 뒤였습니다. 황순주·박기현·김종철은 진주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직접 진주로 달려가, 시위를 이끌던 강달영에게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왔습니다. 거사는 졸업식이 끝난 뒤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이 시작되기 전,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졸업반 학생 이윤조가 속한 편이 이겼습니다. 들뜬 이윤조는 약속한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품에 지니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인 교장이 교직원을 불러 그를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저마다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만세 소리는 교문을 넘어 읍내로 번졌습니다.

헌병분대가 출동해 이윤조를 그 자리에서 붙잡았습니다. 몸을 피한 어른들은 헌병분대장의 집에 격문(항의문)을 던져 넣었습니다. 조선 사람을 죽이는 일을 당장 멈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록에는 이들이 이레 뒤에 붙잡혔다고 남아 있습니다.

사천초등학교 운동장 — 축구 시합이 신호가 된 자리

장면 3삼천포, 3월 25일: 장날과 졸업식이 겹친 날

사천군에서 가장 큰 만세

삼천포는 사천군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경남 도청이 있던 진주로 들어가는 관문 항구여서 새 문물이 빨리 들어왔고, 일본에서 건너온 어민들의 마을도 일찍 자리 잡았습니다. 1910년 무렵 삼천포에 사는 일본인은 100여 호, 440여 명이었습니다.

남양면 사람 박종실이 잡은 거사일은 3월 25일이었습니다. 그날은 삼천포 장날이면서 삼천포공립보통학교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사람이 저절로 모이는 두 조건을 하루에 겹쳐 잡은 것입니다.

이번에도 학생들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며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고, 장터에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호응했습니다. 강금수는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행렬이 시가지로 번지자 경찰이 무장 병력을 동원해 총칼로 해산시키고 주동자들을 붙잡았습니다.

이튿날 3월 26일에도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전날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였습니다.

삼천포 장터 — 장날과 졸업식이 겹친 하루

장면 44월의 사천: 강변에서, 마을에서, 공사장에서

학생이 아닌 사람들이 나섰다

4월 5일, 곤명면 금성리에서는 유생 이영근이 이규현 등과 함께 마을 앞 덕천강 강변에 사람들을 모아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학교도 장터도 아닌 강변이 집결지였습니다. 사천 헌병분대가 출동해 사람들을 흩고 주도자들을 끌고 갔습니다. 이영근과 이규현은 그해 5월 태형 90대를 선고받았습니다.

4월 10일과 16일에는 서포면에서 두 차례 시위가 있었습니다. 송찬홍과 이주효 등이 앞장섰고, 개진학교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전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태극기 수백 장은 송지환과 신영범의 집에서 만들었습니다. 사천에서 누가 어디서 태극기를 만들었는지 이름과 장소가 함께 남은 유일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4월 중순, 사천면 두량리 사람 유승갑과 손계묵이 중선포 도로공사 부역(강제로 동원되는 노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만세를 외쳤습니다. 함께 일하던 인부들이 뒤따랐습니다. 학생도 유생도 아니었습니다. 곡식이 떨어지는 봄에 강제로 끌려 나와 길을 닦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헌병이 달려들면서 여러 사람이 다쳤습니다. 유승갑은 태형 90대를 받았고, 손계묵은 붙잡힌 뒤 부산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천에서 확인되는 마지막 시도는 6월이었습니다. 판결문에 따르면 6월 27일, 축동면사무소 서기 김형권이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빌려 주어, 축동면 길평리 강대익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찍었습니다. 나눠 주기 전에 발각되어 계획은 무산됐습니다. 이 준비는 경남에서 확인되는 3·1운동의 거의 마지막 시도로 꼽힙니다.

중선포 옛 도로 — 부역 인부들이 만세를 부른 길

이 절의 출처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3·1운동」 GC09600448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곤양면 만세운동」 GC09600450 (「김진곤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5.29 인용)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사천읍 만세운동」 GC09600449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삼천포 만세운동」 GC09600451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곤명면 만세운동」 GC09600452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서포면 만세운동」 GC09600454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중선포 만세운동」 GC0960045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천 3·1운동」 E0026011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3·1의거 기적비」 sid 1130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독립만세 100주년기념비」 sid 508
  • 뉴스사천 「어디서나 누구나…사천사람들은 용감했다」 기사 보기
  • 뉴스사천 「삼천포 장날 독립선언서 낭독한 강금수 선생 대통령 표창」 기사 보기

2그날의 사람들

사건에는 이름이 남았고, 이름에는 그 뒤의 삶이 남았습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서 본적이 '경상남도 사천'으로 등록된 독립유공자는 32명입니다(2026년 8월 기준). 이 가운데 3·1운동으로 포상받은 사람은 8명이고, 나머지는 의병·학생운동·국내항일·광복군·일본 방면·만주 방면에서 활동한 사람들입니다.

이름이 지역 기록에 남았는데도 아직 포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축구 시합 뒤 처음 태극기를 꺼낸 이윤조도, 삼천포 만세를 조직한 박종실도 그렇습니다. 발굴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천포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은 강금수는 2025년, 광복 80주년에야 대통령표창을 받았습니다.

김진곤金鎭坤

1890.7.13 ~ 1963.10.5 · 곤양면 송전리

사천에서 가장 먼저 만세를 부른 사람

곤양공립보통학교 학생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3일,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곤양주재소 안으로 던져 넣은 뒤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웃 진주보다 닷새 빨랐습니다. 그해 4월 태형 60대를 선고받았으나 검사가 항소했고,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로 형이 무거워졌습니다.

훈격
1995년 대통령표창
전거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관리번호 9730)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곤양면 만세운동」 GC09600450

유승갑 · 손계묵柳承甲 · 孫桂默

유승갑 1892.10.23 ~ 1960.3.2 / 손계묵 1893(추정) ~ 1919 · 사천면 두량리(현 사천읍 두량리)

길을 닦다 만세를 부른 두 사람 — 한 사람은 살아남고 한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다

같은 마을 사람이었고 같은 날 함께 앞장섰습니다. 1919년 4월 중순, 중선포 도로공사 부역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두 사람이 만세를 선창하자 인부들이 뒤따랐습니다. 학생도 유생도 아닌, 곡식이 떨어지는 봄에 끌려 나와 길을 닦던 사람들이 만든 시위였습니다. 헌병이 달려들어 여러 사람이 다쳤고, 유승갑은 태형 90대를 받았습니다. 손계묵은 붙잡힌 뒤 부산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훈격
손계묵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 / 유승갑 1998년 대통령표창
전거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 유승갑 편(14권)·손계묵 편(22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손계묵」 E0075896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중선포 만세운동」 GC09600453

이영근李永根

1894.5.11 ~ 1922.8.8 · 곤명면 금성리

태형 90대의 후유증으로 3년 뒤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나다

유림 출신입니다. 진주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금성서당 훈장 정원주, 이웃 문형근 등과 뜻을 모아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고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1919년 4월 5일 마을 앞 덕천강 강변에서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다 붙잡혔고, 5월 19일 태형 90대를 선고받았습니다. 매질의 후유증으로 앓다가 1922년 8월 8일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함께 만세를 부른 이규현도 태형 90대를 받았습니다.

훈격
1995년 건국포장 (이규현 2002년 대통령표창)
전거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9640)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곤명면 만세운동」 GC09600452

강금수姜金秀

1899.9.9 ~ 1969.6.13 · 삼천포 동리

2025년에야 이름을 찾은 사람

1919년 3월 25일 삼천포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소리 내어 읽고 청년들의 대열을 이끌었습니다. 붙잡혀 징역 7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고, 1925년에는 삼천포청년회 창립에 참여해 총무로 활동했다고 전합니다. 삼천포 만세운동 참가자 가운데 오랫동안 포상받은 사람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광복 80주년인 2025년에 그가 처음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습니다.

훈격
2025년 대통령표창
전거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관리번호 7609) / 뉴스사천 2025-08-14 news4000.com/55013 / 경남일보 2025-08-17 gnnews.co.kr/616574

최원형崔垣亨

1901.3.13 ~ 1945.2.8 · 서포면 맥사리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으로 내려온 학생 —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옥에서 숨지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고향으로 내려와 해인사에서 공부하던 최범술에게 전했습니다. 사천에 선언서가 들어온 통로였습니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 고향 친구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부탁하는 밀서를 보냈다가 밀고로 붙잡혔고, 1942년 징역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1945년 2월 8일 대전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였습니다.

훈격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전거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112)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최원형」 GC09600856

최범술崔凡述 (효당 曉堂)

1904.5.26 ~ 1979.7.10 · 서포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곤명면 다솔사로 출가

열네 살 학인이 등사기로 찍어 낸 1만 장

1919년 해인사에서 공부하던 학생 신분으로, 최원형에게서 받은 독립선언서를 동학들과 함께 1만여 장 인쇄해 합천·의령·진주·사천·하동 일대에 배포했습니다. 뒤에 다솔사 주지가 되어 불교 강원과 광명학원을 열고,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만당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됐습니다. 광복 뒤에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냈고, 만년에는 원효 연구와 차 문화 복원에 힘썼습니다.

훈격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
전거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4634)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최범술」 GC09600851 / 부산역사문화대전 「범술」 GC04200508

조우제趙佑濟

1885.3.13 ~ 1946.8.5 · 곤양면 송전리(뒤에 진주로 이주)

최범술의 보통학교 시절 선생님

곤양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919년 3월 제자였던 최범술 등에게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진주의 만세운동을 함께 이끌고 선언서를 하동·사천·진주·남해로 퍼뜨렸습니다. 이후 진주청년회·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신간회 진주지회에서 활동했고, 1922년 소작노동자대회에서는 소작인의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1927년 대구에서 일어난 폭탄 의거에 연루되어 1년 4개월가량 옥고를 치렀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앓다가 194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훈격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
전거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90769, 14권)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인명사전

하익봉河益鳳

1926.8.7 ~ 1945 · 삼천포 선룡리

열아홉에 세상을 떠난 독서모임 학생

진주공립중학교에 다니던 1943년 무렵, 친구들과 광명회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어 우리 역사를 함께 공부했습니다. 졸업하면 다 같이 독립군에 들어가자고 약속했습니다. 1944년 9월 진해비행장 건설 공사에 강제로 동원돼 일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우리말과 독립군 이야기를 전하다 헌병대에 붙잡혔습니다. 40일가량 갇혀 고문을 받은 뒤 부산형무소에 수감됐고, 1945년 봄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아홉이었습니다.

훈격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
전거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19권, 관리번호 961664) / 뉴스사천 「광명회,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다」 news4000.com/4332

문수열文洙烈

1923.7.15 ~ 2008.12.23 · 곤명면 금성리

그가 지킨 태극기가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되다

1944년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들어가 작전참모반에서 활동하고 기관지 『빛』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다른 부대로 옮기게 되자 함께 지내던 광복군 70명가량이 그의 태극기 여백에 이름과 글귀를 남겼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희생하자", "자주 자유 자애" 같은 글이 흰 여백을 채웠습니다. 이 태극기는 1986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됐고, 2008년 태극기로는 처음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됐습니다. 2026년 광복절에는 경상남도청과 사천시청 외벽에 이 태극기가 대형 현수막으로 걸렸습니다.

훈격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
전거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공훈록(관리번호 8131)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 뉴스사천 news4000.com/57979

여기 실은 아홉 분 외에도 사천에 본적을 둔 서훈 독립유공자가 32명 있습니다. 전체 명단은 아래 「사천 출신 독립유공자 32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이 지역 기록에만 남고 아직 포상되지 않은 분도 많습니다.

이 절의 출처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바로 가기
  • 경남일보 「경남 출신 독립운동가 21명, 광복 80주년 기념 정부 서훈 영예」 기사 보기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삼천포 만세운동」 GC09600451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조우제」 인명사전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문화유산 정보

3다솔사와 만당

곤명면 봉명산 자락의 절 하나가, 일제강점기 내내 사람과 생각이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다솔사는 지금 국가보훈부가 등록해 관리하는 독립운동 현충시설이기도 합니다. 안심료 앞에는 '만당 근거지'라고 적힌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만당은 1930년 5월 서울에서 만들어진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입니다. 승려이자 시인인 한용운이 당수로 추대됐습니다. 목표는 식민지가 된 불교를 되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가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게 하고, 불교를 대중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도쿄에도 지부를 두었고 1932년 무렵에는 당원이 8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만당은 1933년 내분으로 해산했습니다. 그 뒤 활동의 중심이 옮겨 온 곳이 다솔사입니다. 사천 서포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다솔사로 출가한 최범술이 주지를 맡아 불교 강원을 열었고, 이어 광명학원을 세워 승려와 동네 아이들을 함께 가르쳤습니다. 이 학원의 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소설가 김동리였습니다. 김동리는 다솔사에 머물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훗날 단편 「등신불」을 썼습니다.

1938년 말, 만당의 존재가 일제에 드러났습니다. 김법린·최범술·김범부 등이 붙잡혀 옥고를 치렀습니다.

한용운도 다솔사와 인연이 깊습니다. 1930년 낡은 응진전을 보수한 사람이 한용운이고, 환갑을 맞아 자축연을 연 곳도 다솔사였습니다. 그때 심은 편백나무가 안심료 앞에 지금도 서 있습니다.

이 절의 출처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다솔사」 sid 749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만당」 GC09600457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다솔사」 GC09601017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김동리」 GC09601308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한용운」 GC09600865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한용운」 인명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용운」 E0061853
  • 동국대 불교문화포털 「만당」 항목 보기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사천 다솔사 응진전」 문화유산 정보
  • 김광식, 「다솔사와 항일 비밀결사 卍黨」, 『불교연구』 2018 KCI

4만세 이후의 저항

만세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저항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형태를 바꿔 이어졌습니다.

청년회와 야학 — 배우는 일이 곧 싸움이었다

1920년 무렵 사천청년회가 만들어졌습니다. 회관을 짓고, 축구와 정구 대회를 열고, 강습회와 야학을 운영했습니다. 1925년에는 삼천포청년회와 손잡고 사천청년연맹회를, 1928년에는 사천청년동맹을 만들었습니다.

야학은 배울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글을 익히는 자리였고, 그래서 늘 감시를 받았습니다. 1922년 사천군의 야학은 14곳, 학생은 1,116명이었습니다. 1921년 남양면 송포리에서는 박종실이 야학을 세워 마을들을 돌며 가르쳤습니다. 삼천포 만세를 조직한 박종실과 이름도 한자도 같고 같은 면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인지는 기록이 밝혀 두지 않았습니다.

1932년 3월, 삼천포 용산야학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사상을 퍼뜨리는 기관이라는 혐의였고, 교사 최을환 등 세 명이 붙잡혔습니다. 항의하러 몰려간 학생과 학부모 100여 명 가운데 학부모 12명까지 함께 잡혀갔습니다.

신간회 사천지회 — 1927년

1927년 6월 19일, 사천보통학교에서 신간회 사천지회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박남준이 사회를 보고 서무총무간사를 맡았으며, 이후 황성칠·최병민 등이 지회를 이끌었습니다. 지회는 야학과 문자 보급, 노동자의 권리, 소작 문제, 여성 인권을 다뤘습니다.

학생들 — 모자에 두른 흰 테, 여섯 항목의 요구서

1926년 삼천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모자에 흰 테를 두르고 등교하며 동맹휴학을 했습니다. 1927년 6월에는 사천공립보통학교 5학년 학생들이 구타와 단체 체벌에 항의해 수업을 거부했습니다. 1930년 1월에는 광주학생운동에 함께하려던 계획이 학교에 미리 발각되어 막혔습니다.

1931년 11월 27일, 삼천포공립보통학교 5·6학년 60여 명이 여섯 항목이 적힌 요구서를 일본인 교장에게 내밀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의 수업료를 없앨 것, 가산을 차압하지 말 것, 노예로 기르는 교육을 반대한다는 것, 학생 자치권을 줄 것, 특정 교사를 물러나게 할 것, 경찰이 학교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 주도한 학생 네 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습니다.

농민과 노동자 — 1938년, 150여 명

1930년대 삼천포에서는 야학과 독서회를 거쳐 농민운동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1938년 이른바 '삼천포적색농민조합 사건'으로 150여 명이 검거됐습니다. 사천 출신 서훈 독립유공자 32명 가운데 8명이 이 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입니다.

이 절의 출처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사천청년회」 GC09600445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야학 운동」 GC09600456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항일 학생 운동」 GC09600455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박남준」 GC09600795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최병민」 GC09600853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황성칠」 GC09600868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박이기」 GC09600801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장백윤·정종주·김낙현·문갑이·정성기·정종호 편) 바로 가기

5오늘의 흔적

사천에는 그 봄을 기억하려고 세운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찾아가 볼 수 있는 곳부터 적었습니다.

국가보훈부가 독립운동 현충시설로 등록해 관리하는 사천 소재 시설은 네 곳입니다. 모두 야외이거나 절 마당이어서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지역에서 세운 비석과 탑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다솔사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 417(용산리 86)

건립 — · 관리 다솔사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만당의 근거지. 안심료 앞에 「만당 근거지」 표지판과 한용운 기념 식수가 있습니다.

3·1의거 기적비

사천시 사천읍 수양공원길 115(정의리 212-1) · 산성공원(수양공원) 안

건립 1969년 8월 15일 · 관리 사천읍사무소

곤양에서 중선포까지 이어진 사천 만세운동의 일지가 비면에 정리돼 있습니다.

독립만세 100주년기념비

사천시 사천읍 읍내로 59(사천초등학교 안)

건립 2019년 3월 21일 · 관리 사천초등학교 총동창회

1919년 3월 21일 졸업식 날의 만세를 기립니다. 해마다 3월 재현행사의 헌화 장소입니다.

의사 최원형 기적비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194-1(곤양면사무소 앞)

건립 1995년 10월 · 관리 —

독립선언서를 고향으로 들여오고 광복 여섯 달 전 옥에서 숨진 최원형을 기립니다.

그 밖의 기념물

  • 사천시 항일운동기념탑 사천시 노룡동 사천호국공원 안 · 2022년 12월 준공, 2023년 3월 1일 제막 · 높이 10m. 현충시설 등록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 곤양기미년독립의거기념비 사천시 곤양면 남문외리 117-14 · 기록에 따르면 2020년 2월에 세웠습니다.
  • 서포초등학교 교정 기념비 사천시 서포면 구평리(옛 개진학교 자리) · 1968년 · 비문은 최범술이 지었다고 전합니다.

기억하는 방식은 행사로도 이어집니다. 사천초등학교 총동창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3월에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엽니다. 2026년 3월 20일에 스물세 번째 행사를 치렀습니다. 재학생과 동문, 보훈단체와 시민 400여 명이 모여 기념비에 헌화하고,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삼창을 한 뒤 학교에서 사천읍시장까지 걸어갑니다. 107년 전 학생들이 걸어 나간 길과 같은 방향입니다.

이름을 찾는 일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상남도는 2023년부터 증거가 부족해 포상받지 못한 지역 독립운동가를 직접 발굴해 국가보훈부에 서훈을 신청해 왔고, 사천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 참가자들도 그 대상에 들어 있습니다.

이 절의 출처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다솔사」 sid 749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3·1의거 기적비」 sid 1130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독립만세 100주년기념비」 sid 508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의사 최원형 기적비」 sid 197
  • 내외일보 「107년 전 어린 학생들의 항일 외침, 오늘의 사천을 울리다」 기사 보기
  • 국제뉴스 「사천초등학교서 '제22회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열려」 기사 보기
  • 경남도민일보 「사천 독립운동가 희생정신 되새겨요」 기사 보기
  • 경남일보 「경남서 '대한독립만세' 외친 26명 독립운동가 서훈 신청」 기사 보기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3·1운동」 GC09600448

6연표

1908년 의병 활동부터 2026년의 재현행사까지, 이 페이지에 나온 일들을 시간 순서로 모았습니다.

사천 항일운동 연표 — 1919년 구간은 바탕색으로, 만세운동의 핵심 네 날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습니다.
시기사건비고·전거
1908사천 출신 이상수, 유명국 의진의 중군장으로 지리산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15권)
1919.3.1서울에서 3·1운동 시작—
1919.3.13곤양 — 김진곤이 태극기를 만들어 주재소에 던져 넣고 장터에서 만세. 사천 최초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0 / 「김진곤 판결문」
1919.3.18~21진주 만세운동. 사천 각 면 시위의 직접 계기가 되다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4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0026011
1919.3.21사천읍 —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 날, 축구 시합 뒤 이윤조가 태극기를 꺼내며 시위 시작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49 / 현충시설 sid=508
1919.3.25삼천포 — 장날이자 졸업식 날. 사천군 최대 규모 시위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0026011
1919.3.26삼천포 재시위(전날보다 소규모)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1
1919.4.5곤명면 금성리 — 덕천강 강변에서 이영근·이규현 등이 만세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2
1919.4.6곤양면 2차 시위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0
1919.4.10서포면 1차 시위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4
1919.4.13 또는 14중선포 — 도로공사 부역 인부들이 귀갓길에 만세. 유승갑·손계묵 주도날짜는 기록에 따라 갈림. 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0026011
1919.4.16서포면 2차 시위 / 같은 무렵 곤명 완사 주민들이 옥녀봉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기록옥녀봉 건은 4월 16일·17일로 갈림
1919.4.19곤양면 3차 시위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0
1919.5.19이영근·이규현,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태형 90대 선고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2
1919.5.29김진곤,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 선고「김진곤 판결문」
1919손계묵, 붙잡힌 뒤 부산형무소에서 순국사망 시점은 기록마다 다름
1919.6.27축동면 — 면사무소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 인쇄, 배포 전 발각. 경남 3·1운동의 거의 마지막 시도「박재룡 등 4명 판결문」(1919.9.17)
1920년경사천청년회 결성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45
1921.5남양면 송포리에서 박종실이 야학 설립, 마을을 돌며 교육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6
1922사천군 야학 14곳, 학생 1,116명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6
1922.8.8이영근, 태형 후유증으로 별세(29세)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
1925.12.20삼천포청년회와 연합해 사천청년연맹회 결성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45
1926삼천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 모자에 흰 테를 두르고 동맹휴학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5
1927.6.19신간회 사천지회 창립총회(사천보통학교)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795
1928.1.2사천청년동맹 창립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45
1930.1사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광주학생운동 동참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무산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5
1930한용운, 다솔사 응진전 보수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1930.5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만당 결성(서울). 한용운이 당수로 추대독립기념관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7
1931.11.27삼천포공립보통학교 5·6학년 60여 명, 여섯 항목 요구서를 내고 동맹휴학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5
1932.3.9삼천포 용산야학회 폐쇄, 교사 3명과 학부모 12명 검거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6
1933만당 해산. 이후 다솔사가 활동 거점이 되다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7
1930년대 중반다솔사에 광명학원 개설(연도는 기록에 따라 1934·1937로 갈림). 김동리가 교사로 참여부산역사문화대전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1308
1938만당의 존재가 드러나 김법린·최범술·김범부 등 검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0061853 / 현충시설 sid=749
1938'삼천포적색농민조합 사건'으로 150여 명 검거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장백윤·정종주 편)
1939(1938)한용운의 회갑연이 다솔사에서 열리다. 이때 심은 편백나무가 남아 있음연도는 기록에 따라 갈림
1942최범술,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 / 부산역사문화대전 GC04200508 · 1943년으로 적은 기록도 있음
1944.10문수열, 한국광복군 제3지대 입대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
1945.2.8최원형, 대전형무소에서 순국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
1945 봄하익봉,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19세)사망일·경위는 기록마다 다름
1945.8.15광복—
1968서포초등학교 교정에 기념비 건립(비문 최범술)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54
1969.8.153·1의거 기적비 건립(사천읍)현충시설 sid=1130
1995.10의사 최원형 기적비 건립(곤양면사무소 앞)현충시설 sid=197
2001사천초등학교 총동창회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시작국제뉴스 / 내외일보
2008.8.12문수열의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태극기로는 처음 국가등록문화유산 지정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2019(2018)사천문화원 『사천 항일독립운동사』 발간경남일보 / 경남도민일보 · 발간 연도는 기록에 따라 갈림
2019.3.21사천초등학교에 독립만세 100주년기념비 건립현충시설 sid=508
2020.2곤양기미년독립의거기념비 건립디지털사천문화대전 GC09600448
2022.12사천시 항일운동기념탑 준공(2023년 3월 1일 제막)경남도민일보
2025.8강금수, 광복 80주년 계기 대통령표창 추서공훈전자사료관 / 뉴스사천 / 경남일보
2026.3.20제23회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내외일보

7부록: 사천 출신 독립유공자 32명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서 본적이 '경상남도 사천'으로 등록된 서훈 독립유공자 전원입니다(2026년 8월 16일 조회 기준).

1919년의 사천군에는 지금의 삼천포가 포함되므로 삼천포 본적자도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름은 가나다순입니다.

사천 출신 독립유공자 32명 — 전체 명단 펼치기
본적이 '경상남도 사천'으로 등록된 서훈 독립유공자 32명 (가나다순)
#성명생몰 본적운동계열훈격포상연도
1강금수姜金秀1899.9.9 ~ 1969.6.13삼천포 동리3·1운동대통령표창2025
2강대진姜大振1916.3.27 ~ 미상삼천포 동림리국내항일건국훈장 애족장2022
3김낙현金洛顯1917.8.10 ~ 1987.3.31삼천포 동리국내항일건국포장2004
4김진곤金鎭坤1890.7.13 ~ 1963.10.5곤양면 송전리3·1운동대통령표창1995
5김형권金亨權1894.12.10 ~ 1943.1.20축동면 중선리3·1운동건국훈장 애족장1990
6문갑이文甲伊1909.6.3 ~ 1983.3.13삼천포 이홀리국내항일건국훈장 애족장2004
7문수열文洙烈1923.7.15 ~ 2008.12.23곤명면 금성리광복군건국훈장 애족장1991
8박영수朴永秀1906.5.27 ~ 미상삼천포 선구리국내항일대통령표창2020
9박이기朴二基1914.8.30 ~ 1950.6.30삼천포 동리국내항일건국훈장 애족장2020
10손계묵孫桂默1893(추정) ~ 1919사천면 두량리3·1운동건국훈장 애국장2014
11송지환宋芝煥1903.6.18 ~ 1929.4.1서포면 선전리국내항일건국훈장 애족장1992
12신영안申瑛桉1899.1.14 ~ 1944.7.15읍남면 온정리학생운동건국훈장 애족장1995
13유승갑柳承甲1892.10.23 ~ 1960.3.2사천면 두량리3·1운동대통령표창1998
14이규현李圭玄1887.10.16 ~ 1972.9.1곤양면 금성리3·1운동대통령표창2002
15이상수李尙銖1873.7.1 ~ 1923.4.6읍동면 고읍리의병건국훈장 애국장2001
16이영근李永根1894.5.11 ~ 1922.8.8곤명면 금성리3·1운동건국포장1995
17장경張駉1920.6.27 ~ 1979.9.21삼천포 선구리일본방면건국훈장 애족장2003
18장백윤張伯允1905.9.13 ~ 미상삼천포 이홀리국내항일건국훈장 애족장2019
19정성기鄭聖基1918.4.27 ~ 1980.8.10삼천포 이금리국내항일건국포장2005
20정종주鄭瑽柱1908.11.19 ~ 1992.7.21삼천포 이금리국내항일건국훈장 애족장2006
21정종호鄭鍾浩1913.4.12 ~ 1967.4.14삼천포 이금리국내항일건국포장2002
22정태술鄭泰述1896.12.27 ~ 1935(추정)사천면 정의리일본방면건국훈장 애족장2006
23정한영鄭漢永1912.11.1 ~ 1975.5.13삼천포 동리학생운동건국훈장 애족장1992
24조우제趙佑濟1885.3.13 ~ 1946.8.5곤양면 송전리국내항일건국훈장 애족장1997
25천성욱千星旭1924.1.14 ~ 2012.11.15사천면 선인리일본방면대통령표창2023
26최명석崔命錫1913.4.15 ~ 1968.5.23삼천포 서리국내항일건국훈장 애족장1996
27최범술崔凡述1904.5.26 ~ 1979.7.10곤명면 용산리3·1운동건국훈장 애족장1990
28최봉조崔奉祚1888.8.21 ~ 미상읍동면만주방면건국포장2011
29최연종崔演鍾1925.6.4 ~ 1999.11.24용당리국내항일건국훈장 애족장1990
30최원형崔垣亨1901.3.13 ~ 1945.2.8서포면 맥사리일본방면건국훈장 애국장1990
31하익봉河益鳳1926.8.7 ~ 1945삼천포 선룡리학생운동건국훈장 애족장2010
32하치량河致亮1922.5.18 ~ 1950.9.29사남면 죽천리일본방면건국훈장 애족장1996
  •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 18명 · 대통령표창 6명 · 건국포장 5명 · 건국훈장 애국장 3명
  • 운동 계열 — 국내항일 13명 · 3·1운동 8명 · 일본 방면 5명 · 학생운동 3명 · 의병 1명 · 광복군 1명 · 만주 방면 1명
  • 본적 — 삼천포 14명 · 사천면 4명 · 곤명면 3명 · 곤양면 3명 · 서포면 2명 · 읍동면 2명 · 그 밖의 면 4명
  • 포상 시기 — 1990년대 14명 · 2000년대 9명 · 2010년대 4명 · 2020년대 5명 — 발굴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표는 본적을 기준으로 한 명단입니다. 사천에서 활동했으나 본적이 다른 분, 지역 기록에는 이름이 남았으나 아직 포상되지 않은 분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8출처

각 절 끝에 붙인 「이 절의 출처」를 여기에 모두 모았습니다.

1급 — 정부·공공기관 원출처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본적 '경상남도 사천' 32명) 바로 가기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다솔사」(sid 749) 바로 가기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3·1의거 기적비」(sid 1130) 바로 가기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독립만세 100주년기념비」(sid 508) 바로 가기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의사 최원형 기적비」(sid 197) 바로 가기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한용운」 바로 가기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조우제」 바로 가기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바로 가기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사천 다솔사 응진전」 바로 가기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사천 다솔사 대양루」 바로 가기

2급 — 백과사전·학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천 3·1운동」 E002601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손계묵」 E007589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용운」 E006185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봉명산 다솔사」 E0013469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3·1운동」 GC09600448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곤양면 만세운동」 GC09600450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사천읍 만세운동」 GC09600449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삼천포 만세운동」 GC09600451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곤명면 만세운동」 GC09600452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서포면 만세운동」 GC09600454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중선포 만세운동」 GC09600453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만당」 GC09600457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다솔사」 GC09601017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최범술」 GC09600851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최원형」 GC09600856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김동리」 GC09601308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한용운」 GC09600865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사천청년회」 GC09600445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야학 운동」 GC09600456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항일 학생 운동」 GC09600455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박남준」·「최병민」·「황성칠」·「임순백」·「박이기」 — GC09600795 · GC09600853 · GC09600868 · GC09600826 · GC09600801
  •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일제 강점기」 GC09600439
  • 부산역사문화대전 「범술」 GC04200508
  • 동국대 불교문화포털 「만당」 항목 보기
  • 김광식, 「다솔사와 항일 비밀결사 卍黨」, 『불교연구』 2018 KCI

3급 — 언론·지역 매체

  • 뉴스사천 「어디서나 누구나…사천사람들은 용감했다」(2019) 기사 보기
  • 뉴스사천 「일제에 당당히 맞서 싸운 사천 학생독립운동가는?」(2019) 기사 보기
  • 뉴스사천 「삼천포 장날 독립선언서 낭독한 강금수 선생 대통령 표창」(2025) 기사 보기
  • 뉴스사천 「광명회,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다」(2010) 기사 보기
  • 뉴스사천 「사천 출신 광복군 문수열 선생의 태극기, 시청에 내걸려」(2026) 기사 보기
  • 경남일보 「경남 출신 독립운동가 21명, 광복 80주년 기념 정부 서훈 영예」(2025) 기사 보기
  • 경남일보 「경남서 '대한독립만세' 외친 26명 독립운동가 서훈 신청」 기사 보기
  • 경남도민일보 「사천 독립운동가 희생정신 되새겨요」(2023) 기사 보기
  • 내외일보 「107년 전 어린 학생들의 항일 외침, 오늘의 사천을 울리다」(2026) 기사 보기
  • 국제뉴스 「사천초등학교서 '제22회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열려」 기사 보기

원사료 — 2차 자료가 인용한 것(원문 미확인)

  • 「김진곤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5.29)
  • 「박재룡 등 4명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9.17)
  • 『대정팔년조선소요사건상황』(조선헌병대사령부, 1919) · 『고등경찰관계적록』(경상남도경찰부, 1936)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일본육군성, 1919)
  • 『매일신보』 1919.3.30 · 1919.4.25 「사천, 길 닦다가 만세」
  • 추경화, 『사천 항일독립운동사』(사천문화원, 2018 — 발간 연도를 2019년으로 적은 기록도 있습니다) · 『사천시사』(2003)

이 페이지는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현충시설정보서비스, 독립기념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디지털사천문화대전, 지역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기록이 어긋나는 부분은 한쪽을 고르지 않고 함께 적었습니다. 잘못된 내용을 발견하시면 알려 주세요. (최종 정리 2026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