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의 사천 앞바다. 왼쪽 앞에 소나무가 자란 바위 곶이 있고, 잔물결이 이는 바다 건너 멀리 낮은 산줄기와 섬들이 이어진다. 오른쪽 끝 바위 위에 흰 등대가 서 있다.

사천 이야기 · 1592

1592,
사천 앞바다

거북선이 처음 싸운 바다입니다

스크롤하면 그날 하루를 따라갑니다

지금의 사천 바다. 1592년 음력 5월 29일, 이 앞바다에서 거북선이 처음 싸웠습니다. 사진: GNUErkin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1592년 음력 5월 29일, 지금의 양력으로 7월 8일. 사천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맞붙었습니다. 이 전투가 거북선이 실제 싸움에 처음 나선 전투입니다.

사천은 경상남도 남해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지금은 조용한 바다지만, 434년 전 이 바다에서 하루 동안 큰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날 조선 함대의 맨 앞에는 처음 보는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지붕을 덮고 그 위에 쇠송곳을 세운 배, 거북선입니다. 거북선은 그때까지 시험만 해 보았을 뿐 실제 전투에는 나선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로부터 431년이 지난 2023년, 대한민국 정부는 양력 7월 8일을 방위산업의 날로 정했습니다.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날을 국가기념일로 삼은 것입니다.

이 페이지는 그날 하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북선이 어떤 배였는지, 그리고 지금 사천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순서대로 정리했습니다. 기록이 서로 어긋나는 곳에서는 한쪽을 고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는 “전한다”라고 적었습니다.

1592년 음력 4월 ~ 5월

01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천해전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해 봄에 전쟁이 터졌고, 이순신은 이미 한 차례 바다로 나갔다 돌아온 뒤였습니다.

부산에 일본군이 들어왔습니다

1592년 음력 4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진에서는 정발이, 동래에서는 송상현이 맞섰지만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육지에서는 일본군이 빠르게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여수에 있는 본영에서 함대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라좌수사는 전라도 왼쪽 바다를 지키는 수군 사령관을 말합니다.

기록 노트 전쟁이 시작된 날짜

임진왜란이 시작된 날을 음력 4월 13일로 적은 기록도 있고, 4월 14일로 적은 기록도 있습니다. 배가 떠난 날, 부산 앞바다에 닿은 날, 성이 함락된 날 가운데 어느 날을 시작으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페이지에서는 “1592년 음력 4월”까지만 적었습니다.

첫 번째 출전 — 옥포에서 적진포까지

이순신의 첫 출전은 음력 5월 4일 새벽, 여수 본영을 떠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판옥선 24척과 작은 배들을 합쳐 모두 85척이 함께 나섰습니다. 판옥선은 갑판 위에 다시 지붕 층을 올린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입니다.

5월 7일 옥포와 합포에서, 5월 8일 적진포에서 싸웠습니다. 첫 출전 전체 전과는 일본 배 37척을 부순 것이었고, 조선 쪽 피해는 부상 1명이었습니다.

1592년 이순신이 치른 해전의 위치 모식도 남해안을 단순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서쪽에서 동쪽 순서로 여수 본영, 사천,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합포, 옥포, 율포가 표시돼 있고, 사천은 남해안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여수 본영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합포 옥포 율포 적진포 사천 서쪽 ← 여수 · 남해안 · 거제 → 동쪽
이순신이 1592년에 치른 해전의 위치. 사천은 남해안 한가운데 있습니다. 위치 관계만 보여 주는 모식도입니다. 축척과 해안선 모양은 실제와 다릅니다.

두 번째 출전 — 기다리지 않고 떠났습니다

두 번째 출전은 원래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와 함께 나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곤양과 사천까지 일본 배가 들어왔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순신은 이억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났습니다.

그날 일기의 첫 문장이 그 상황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우수사가 오지 않아 홀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右水使不來 獨率諸將

난중일기 임진년 5월 29일

두 번째 출전은 음력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사천은 그 첫 전투였습니다.

1592년 음력 5월 29일 (양력 7월 8일)

02사천 앞바다, 그날

새벽에 여수를 떠난 함대는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천으로 향했습니다. 그날 하루에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노량에서 합류했습니다

함대는 새벽에 출발해 노량에 이르렀습니다. 노량은 지금의 남해와 하동 사이 좁은 바닷길입니다. 여기서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선 3척을 이끌고 합류했습니다.

이순신의 전선은 23척이었고, 그 안에 거북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원균의 3척을 더해 조선 연합함대는 모두 26척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출발해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가 와서 만났다

曉發直到露梁 則慶尙右水使來會

난중일기 임진년 5월 29일

그곳에서 적이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사천 선창에 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선창(船滄)은 배를 대는 곳을 말합니다.

배는 물가에, 사람은 산 위에 있었습니다

사천에 닿았을 때 상황은 이랬습니다. 일본군은 이미 배에서 내려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고, 배 12척은 산 아래 물가에 줄지어 대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산 위에서는 굳게 버티며 싸울 태세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물이 빠져 있었습니다. 판옥선은 큰 배라서 물이 빠진 포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억지로 들어가면 배가 바닥에 걸립니다.

물러나는 척했습니다

이순신은 물때를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물러나는 시늉을 했습니다. 조선 함대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자 산 위에 있던 일본군은 배를 타고 바깥 바다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사천해전의 유인 전술입니다. 조선 수군이 이기려면 큰 배가 움직일 수 있는 넓고 깊은 물에서 싸워야 했고, 그러려면 상대가 포구 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1592년 음력 5월 29일 사천해전 전개도 서쪽 여수 본영에서 출발한 조선 함대가 노량을 거쳐 북동쪽 사천 선창에 이르고, 물이 빠져 들어가지 못하자 남쪽 바깥 바다로 물러나는 척했다가, 물이 차오른 뒤 거북선을 앞세워 되돌아가 싸우고, 사천만 안쪽 모자랑포에 머무는 흐름을 그린 그림입니다. 1 2 3 4 5 6 여수 본영 노량 사천 선창 바깥 바다 거북선 돌격 모자랑포 함대의 이동 물러나는 척한 길 거북선을 앞세운 돌격
  1. 여수 본영 출항
  2. 노량에서 원균 합류
  3. 사천 선창 도착, 물이 빠져 진입 불가
  4. 물러나는 척해 바깥 바다로 유인
  5. 밀물로 바뀐 뒤 거북선을 앞세워 돌격
  6. 모자랑포에 머무름
1592년 음력 5월 29일 사천해전의 흐름. 이 그림은 이 페이지에서 직접 만든 도해입니다. 흐름을 보여 주는 모식도이며 축척 지도가 아닙니다.

사천해전 하루의 전개를 그린 옛 도해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공공누리로 개방한 「사천 해전도」가 있으나 회화 계열이라 시간 흐름 라벨이 없고, 이 페이지에서는 내려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자료를 어디서 볼 수 있는지는 자료 출처에 적어 두었습니다.

물이 차오르자, 거북선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빠졌던 물이 다시 밀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판옥선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맨 앞에 세워 적 함대 한가운데로 돌진시켰습니다. 뒤따르던 판옥선들이 각종 총통을 일제히 쏘았습니다. 총통은 조선 수군이 쓰던 대포입니다.

화살을 비처럼 쏘고 각종 총통을 우레와 바람같이 어지럽게 놓으니 적의 무리가 두려워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인지 알 수 없고, 열세 척을 불살라 없앴다

射矢如雨 放各㨾銃筒 亂如風雷 賊徒畏退 逢箭者不知幾百數 焚滅十三隻

난중일기 임진년 5월 29일

거북선이 실제 전투에 나선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모두 사천해전을 거북선의 첫 실전으로 적고 있습니다.

기록 노트 배는 몇 척이었을까

사천 선창에 대어 놓았던 일본 배는 12척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불태운 배는 13척이라고 적힌 기록이 있습니다. 사천만에서 먼저 잡은 배 한 척을 더해 13척으로 본다는 해석이 있고, 그날 10척을 부수고 이튿날 나머지 2척을 부숴 합계 12척으로 적은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페이지는 “머물러 있던 배 12척”과 “부순 배 12~13척”을 나누어 적었습니다. 한쪽만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기록 노트 거북선은 몇 척이었을까

정부 자료는 이날 거북선 2척이 투입됐다고 봅니다. 그런데 난중일기 그날 일기에는 거북선의 척수가 적혀 있지 않고,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도 “선두에 거북선이 있었다”고만 씁니다. 그래서 이 페이지 본문에서는 척수를 확정해 적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이 다쳤습니다

이날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습니다. 조총에서 나간 탄환이 어깨를 뚫고 등까지 관통했습니다. 함께 있던 군관 나대용도 탄환에 맞았습니다. 나대용은 거북선 건조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 역시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까지 관통했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軍官羅大用中丸 余亦左肩上中丸 貫于背 不至重傷

난중일기 임진년 5월 29일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적었지만, 이 상처는 오래 낫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이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깨뼈를 깊이 상한 데다 늘 갑옷을 입고 있어 상처가 헐고 진물이 흘렀으며, 밤낮으로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낫지 않았다는 취지의 말이 남아 있다고 전합니다.

전투가 끝난 뒤 함대는 사천만 안쪽 모자랑포에 머물렀습니다.

기록 노트 몇 명이 죽었을까

사천에서 일본군 2,600여 명을 무찔렀다는 숫자가 관광 안내문이나 신문 기사에 나옵니다. 이 숫자는 1950년대에 세워진 모충공원의 이순신 공덕기념비 비문 계열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정작 이순신 본인은 그날 일기에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인지 알 수 없다”고만 적었습니다.

그래서 이 페이지는 사상자 수를 본문에 확정형으로 쓰지 않습니다. 기념비에 새겨진 숫자와 당사자가 남긴 기록이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확정된 것과 아직 모르는 것

03거북선

거북선은 이순신이 발명한 배가 아닙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말도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천해전의 거북선은 특별합니다. 왜 그런지 하나씩 보겠습니다.

언제 만들었을까 — 전쟁 나기 두 달 전

난중일기에 거북선이 처음 나오는 날은 1592년 음력 2월 8일입니다.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는 짧은 기록입니다. 돛베는 돛을 만드는 천입니다.

그다음이 3월 27일입니다. 소포에서 쇠사슬 매는 일을 감독하면서 거북선에서 대포를 쏘아 보았다고 적었습니다.

마지막이 4월 12일입니다. 식사를 마친 뒤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고 했습니다. 지자포와 현자포는 조선 수군이 쓰던 대포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4월 13일 무렵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시험 발사를 마친 지 하루 만에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그로부터 46일 뒤, 거북선은 사천 바다에서 처음 싸웠습니다.

“거북선이 처음 싸웠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여기서 짚고 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날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화살과 총통을 어지럽게 쏘았다는 서술만 있습니다.

그러면 거북선이 그날 처음 싸웠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 곧 장계(狀啓)입니다. 사천·당포·당항포·율포에서 있었던 일을 한데 묶어 보고한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이 그것입니다. 이 장계에서 이순신은 거북선을 따로 만든 경위와 그 생김새를 직접 설명했습니다. 통용되는 번역문은 이렇게 전합니다.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따로 귀선(龜船)을 만들었습니다. 앞에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하여,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했습니다.

「당포파왜병장」(통용 번역문)

누런 표지에 壬辰狀草라는 한자가 세로로 적힌 옛 책이 왼쪽에 놓여 있고, 그 오른쪽에 같은 책을 펼친 지면이 있다. 붓으로 쓴 한문이 세로로 빽빽하게 적혀 있고 군데군데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임진장초』.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를 옮겨 적어 둔 책입니다. 사천해전의 전과를 보고한 「당포파왜병장」도 이 계열의 문서입니다. 문화재청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나무로 만든 거북선 복원선의 뱃머리. 입을 크게 벌린 짙은 갈색 용머리가 앞으로 뻗어 있고, 뱃전 나무판에는 검은 쇠장식과 둥근 포 구멍이 보인다.
복원 거북선의 용머리. 장계는 이 입으로 대포를 쏘았다고 적었습니다. 사진: Steve46814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기록 노트 난중일기와 장계는 다른 문서입니다

“난중일기에 거북선 첫 출전이 적혀 있다”는 설명을 종종 봅니다. 정확하지 않습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개인 일기이고, 장계는 조정에 올린 공식 보고서입니다. 거북선 첫 출전의 직접 근거는 장계 쪽에 있습니다.

덧붙이면, 난중일기 친필 초고본은 1592년 5월 5일부터 28일까지가 빠져 있습니다. 5월 29일 일기는 그 빈 구간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첫 장입니다.

이순신이 발명한 배는 아닙니다

거북선을 뜻하는 귀선(龜船)이라는 이름은 이순신보다 180년쯤 앞선 조선 태종 때 기록에 이미 나옵니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거북선 기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태종 때의 거북선과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은 생김새도 쓰임도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학계가 쓰는 표현은 “발명”이 아니라 “건조”입니다. 이순신이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 전쟁에 대비해 스스로 판단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조선 초부터 있던 개념을 전라좌수영에서 새로 만들어 되살린 배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기록 노트 “세계 최초의 잠수함”은 번역 오류에서 나왔습니다

거북선을 잠수함이라고 소개하는 글이 아직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1919년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펴낸 『한일관계사료집』이 한 선교사의 영문 표현 “Korea’s one little iron clad”(작은 철갑함)를 “철갑 잠항정”으로 잘못 옮겼고, 1921년 신문이 이를 옮겨 실으면서 퍼졌습니다. 이를 처음 전한 신문사는 1992년에 이 이야기를 “풍설”이라고 바로잡았습니다.

어떻게 생겼을까 — 확정된 것

옛 책에 목판으로 찍은 거북선 그림. 옆에서 본 배의 등판이 육각 무늬로 촘촘히 덮여 있고, 뱃머리에는 입을 벌린 용머리가 있으며, 뱃전 아래로 노가 여러 개 뻗어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도설. 1795년(정조 19년)에 간행된 책에 실린 그림으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거북선 그림입니다. 사진: PHGCOM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거북선 복원선의 덮개 모서리를 가까이서 찍은 사진. 회청색 덮개 위에 검고 뾰족한 쇠송곳이 촘촘히 줄지어 서 있다.
덮개 위의 쇠송곳. 적이 배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사진: Steve46814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거북선 재현선의 안쪽. 굵은 나무 기둥과 둥근 천장 서까래가 이어지고, 널을 깐 바닥 위로 관람객들이 서 있으며 벽 쪽에 안내판과 등이 달려 있다.
복원 거북선의 안쪽. 노를 젓는 자리와 포를 쏘는 자리가 한 층에 있습니다. 사진: Junho Jung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통영항 재현선

어떻게 생겼을까 — 아직 모르는 것

“모른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흐린 날 바다에 떠 있는 거북선 복원선을 뒤쪽 비스듬히에서 본 모습. 둥근 덮개 위에 뾰족한 돌기가 촘촘하고, 돛대 두 개가 서 있으며, 오른쪽 앞에 용머리가 보인다.
해군사관학교가 관리하는 복원 거북선. 복원선은 저마다 어느 학설을 따랐는지가 다릅니다. 사진: hyolee2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펼쳐 놓은 옛 목판본 책. 왼쪽 지면에 거북선 그림이 실려 있고 오른쪽 지면은 한문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거북선 그림이 실린 『이충무공전서』 지면. 이 책은 1795년에 간행되었습니다. 사진: PHGCOM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대영박물관 소장본 촬영
기록 노트 우리가 아는 거북선 그림은 1795년 그림입니다

교과서와 안내판에서 보는 거북선 그림은 대부분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도설(그림 설명)에서 왔습니다. 이 책은 정조 19년, 1795년에 간행되었습니다. 사천해전보다 203년 뒤입니다.

2026년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발표한 전체 길이 35.27m, 무게 약 140톤이라는 수치도 이 1795년 도설을 분석한 결과입니다. 1592년 사천 바다에 있던 거북선의 크기가 아닙니다. 이 페이지에서 거북선 그림을 볼 때는 “1795년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국가유산청이 만든 거북선 영상입니다(4분). 영상: 국가유산채널(국가유산청) / 유튜브. 재생 버튼을 눌러야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흐린 날 광장에 전시된 실물 크기 거북선 재현선의 옆모습. 나무 덮개 위에 뾰족한 돌기가 줄지어 있고, 왼쪽 끝에 용머리가 뻗어 있으며, 돛대 세 개와 색색의 깃발이 서 있다.
실물 크기로 만든 거북선 재현선. 전국 여러 곳에 이런 재현선이 있고, 사천에도 삼천포대교공원에 한 척이 있습니다. 사진: Thu_Reyn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여수

지금의 달력으로

04그날이 국가기념일이 되었습니다

1592년 음력 5월 29일을 지금 달력으로 옮기면 7월 8일입니다. 2023년, 대한민국은 이 날을 국가기념일로 정했습니다.

방위산업의 날입니다. 「방위산업 발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2023년 8월 8일 공포되면서 제정되었습니다.

날짜를 정하는 과정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방위사업청이 국민과 방산업체를 대상으로 어떤 날이 좋겠는지 설문을 했고, “최초 거북선 출전일”이 1위로 뽑혔습니다. 우리 기술로 설계하고 만든 배가 처음 싸워 이긴 날이라는 것이 선정 이유였습니다. 첫 기념행사는 2025년 7월 8일에 열렸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천 앞바다에서 거북선이 처음 싸운 날이, 지금 대한민국의 국가기념일입니다. 이것은 지역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법률과 정부 문서로 뒷받침되는 사실입니다.

사천시도 매년 양력 7월 8일에 승전 기념식을 엽니다. 장소는 남양동 모충공원 안에 있는 성웅 이순신 공덕 기념비 앞입니다. 2026년이 434주년이었습니다.

덧붙이면, 이순신과 관련된 법정기념일은 하나가 더 있습니다. 양력 4월 28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입니다. 이순신이 태어난 1545년 음력 3월 8일을 양력으로 옮긴 날입니다. 태어난 날과 거북선이 처음 싸운 날, 두 날이 모두 나라의 기념일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7월 8일

방위산업의 날

1592년 사천해전 승전일(음력 5월 29일)을 양력으로 옮긴 날

2023

국가기념일 제정

「방위산업 발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 공포(8월 8일)

434

2026년 기준 주년

사천시가 모충공원에서 매년 여는 승전 기념식

모충공원 사진 자리는 비워 두었습니다. 사천시가 해마다 양력 7월 8일 모충공원에서 사천해전 승전 기념식을 엽니다. 그런데 이 공원과 기념식을 찍은 사진 가운데 이용 조건이 확인된 것을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진을 끼우는 대신 자리를 비워 두고, 그 사실을 여기 적어 둡니다.

사천에 오시기 전에

051592와 1598은 다른 전투입니다

사천에는 임진왜란 유적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상당수는 1592년 사천해전이 아니라 1598년 사천성 전투의 유적입니다. 사천에 오시기 전에 이 부분을 한 번 짚고 가면 좋겠습니다.

두 전투는 6년 차이가 나고, 싸운 곳도 싸운 방식도 다릅니다.

사천해전과 사천성 전투 대조표
구분 사천해전 사천성 전투(선진리성 전투)
시기1592년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 · 임진왜란 초기1598년 음력 9~10월 · 정유재란 말기
성격바다에서 싸운 해전육지에서 성을 두고 싸운 공성전
조선 측이순신의 전라좌수군 + 원균의 경상우수군, 전선 26척조선·명 연합군 약 4만 명
상대사천 선창에 머물던 일본 배 12척선진리성에 들어가 버틴 일본군 약 7,000~8,000명
결과조선 수군 승리. 일본 배 12~13척 격침명군 진영의 화포 폭발 사고로 연합군이 물러남
관련 유적모충공원(기념비·동상), 사천해전 전망교선진리성, 조명군총

선진리성은 사천해전 때 없던 성입니다

선진리성은 1597년 음력 10월 하순에 짓기 시작해 그해 12월에 완성된 일본식 성곽, 곧 왜성입니다. 1592년 사천해전이 벌어졌을 때 이 성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이 선진리왜성 앞에서 싸웠다”는 설명은 시대가 어긋난 이야기입니다. 1592년의 사천 선창과 1597년 이후의 선진리성은 같은 선진리 일대에 있지만, 시간이 다릅니다.

한 가지 헷갈리기 쉬운 점이 더 있습니다. 사천해전 승첩기념비가 바로 이 선진리성 안에 서 있습니다. 1598년 전투의 유적 안에 1592년 전투의 기념비가 있는 셈입니다. 두 가지를 함께 보시되, 성벽과 기념비는 다른 사건의 것이라고 나누어 보시면 됩니다.

벚꽃이 활짝 핀 언덕 위 성터. 돌을 쌓아 만든 축대가 층을 이루며 이어지고, 그 위 평평한 터를 사람들이 걷고 있다.
사천 선진리성. 성 자체는 1597년에 지어진 일본식 성곽이고, 그 안에 사천해전 승첩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사진: 문화재청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원 공공누리 제1유형)

조명군총은 1598년 전사자의 무덤입니다

선진리성 근처에 있는 사천 조명군총은 1598년 사천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명 연합군의 무덤입니다.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고, 1983년에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가 세워졌습니다. 매년 10월 1일에 위령제를 지냅니다.

이곳은 사천해전과는 관계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같은 도시, 같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묻힌 곳입니다. 사천해전을 보러 오셨더라도 잠시 들러 볼 만합니다.

한낮의 해안

06지금 가볼 수 있는 곳

1592년의 배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신 그날을 기억하려고 만든 자리들이 남아 있습니다. 카드마다 어떤 성격의 장소인지 먼저 적어 두었습니다. 사료로 확인된 것과 전해 오는 이야기를 구분해서 보시라는 뜻입니다.

사천해전 유적을 둘러볼 때 알아 두면 좋은 것이 있습니다. 사천에는 1592년 사천해전 당시의 건물이나 시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안선도 바뀌었습니다. 지금 남은 것은 그날을 기억하려고 후대가 만든 기념 시설, 성격이 다른 시기의 유적, 그리고 이야기입니다.

전투 장소에 대해서도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난중일기와 장계는 전투가 벌어진 곳을 “사천 선창(泗川船滄)”이라고만 적었습니다. 이 자리를 지금의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일대로 보는 견해가 통설이고, 지자체와 백과사전 대부분이 그렇게 씁니다. 다만 최근 학계에서는 이 비정에 근거가 부족하다는 문제 제기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페이지는 “선진리 일대로 보는 견해가 통설”이라고 적습니다.

기념 시설

모충공원

사천시 송포동 1144-1

사천해전 승리를 기려 조성한 공원입니다. 성웅 이순신 공덕 기념비와 동상이 나란히 서 있고, 사천해전이 벌어진 바다가 내려다보입니다. 사천시가 매년 양력 7월 8일 승전 기념식을 여는 곳입니다.

기념비 건립 시기는 기록에 따라 1952년과 1953년으로 갈립니다. 비 옆면의 단기 기년(단기 4285년 = 서기 1952년)은 1952년 쪽을 뒷받침합니다. — 공원 근처의 모충사는 불교 사찰이며 이순신 사당이 아닙니다. 이름이 비슷하니 헷갈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승

대방진굴항

사천시 굴항길 82-10(대방동)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게 둑을 굽게 쌓아 배를 숨겨 두던 인공 항구입니다.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1983년에 지정되었습니다.

“이순신이 여기에 거북선을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는 전해 오는 일화이며, 사료로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다. 지금 남아 있는 굴항 구조물은 1820년 무렵 조선 순조 때 다시 쌓은 것으로, 사천해전보다 230년쯤 뒤의 시설입니다. 기원은 고려 후기 왜구를 막으려 둔 구라량영의 군항 시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체험 시설

삼천포대교공원 거북선 모형

사천시 사천대로 35(대방동)

실물 크기 거북선 모형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안에는 무기고·식량고·수면실과 총통 모형이 놓여 있습니다.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사천해전을 기념해 설치했습니다.

공원은 연중 열려 있고, 거북선 모형 안으로 들어가는 관람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르니 방문 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사천시 관광부서 055-831-2785). 이 모형은 3층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거북선이 실제로 몇 층이었는지는 아직 학설이 갈립니다. 모형의 구성이지 확정된 사실이 아닙니다.

체험 시설

사천거북선마을

사천시 용현면 사천대교로 75-61(주문리 733)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바다를 낀 어촌마을입니다. 2018년 농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되었고, 갯벌 체험과 ‘최초 거북선 길’ 탐방, 거북선 열쇠고리 만들기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매년 「거북선마을 축제」가 열립니다(2025년 제10회). 프로그램과 일정은 해마다 달라집니다.

다른 전투의 유적

선진리성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70 일원

1597년에 일본군이 쌓은 왜성입니다. 1592년 사천해전 때는 없던 성입니다. 다만 성 안에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첩기념비」가 서 있고, 이 일대가 사천 선창 자리로 비정됩니다. 벚나무 700여 그루가 있어 봄에 벚꽃축제가 열립니다.

성 자체는 1598년 사천성 전투와 연결되는 유적입니다. 1592년 사천해전과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 안의 승첩기념비는 1978년에 세워졌다고 전합니다. 근처에 1598년 전사자의 무덤인 조명군총(용현면 선진리 402)이 있습니다.

조망 시설

사천해전 전망교

사천시 용현면 주문리 일원(무지갯빛 해안도로)

사천해전이 벌어진 바다를 바라보라고 만든 다리입니다. 폭 2.3m, 길이 83m로 2023년 12월에 조성을 마쳤습니다.

근처에 높이 65m 전망타워를 세우는 사업이 2026년 2월 착공해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완공 목표는 2028년 2월입니다(2026년 8월 기준).

대방진굴항의 구조 모식도 위에서 내려다본 그림입니다. 둑이 초승달처럼 굽어 안쪽에 둥근 물웅덩이를 감싸고, 입구가 옆으로 비껴 나 있어 바깥 바다에서 안쪽이 곧바로 보이지 않습니다. 배를 대던 안쪽 좁고 비껴 난 입구 바깥 바다 굽게 쌓은 둑
대방진굴항.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둑을 굽게 쌓은 인공 항구입니다. 구조를 설명하려고 이 페이지에서 직접 만든 도해입니다. 실측 도면이 아닙니다.

영상: 사천TV(사천시) / 유튜브. 재생 버튼을 눌러야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맑은 날 바다를 가로지르는 사장교. 흰 주탑 두 개에서 뻗은 케이블이 붉은 상판을 잡고 있고, 왼쪽으로 초록 산과 항구 마을이 이어진다.
삼천포대교. 대방진굴항과 삼천포대교공원이 이 다리 근처에 모여 있습니다. 사진: Glabb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영상: 사천TV(사천시) / 유튜브. 재생 버튼을 눌러야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대방동 묶음 도보·차량 5분권

대방진굴항 → 삼천포대교공원(거북선 모형) → 사천바다케이블카

용현면–남양동 묶음

선진리성(사천해전 승첩기념비) → 사천거북선마을 → 사천해전 전망교 → 사천대교 → 모충공원

두 번째 묶음은 사천시가 조성한 이순신바닷길 2코스 「최초 거북선길」과 대체로 겹칩니다.

덧붙이면, 선진수변공원이 2025년 선진거북선공원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날의 두 사람

이순신

생몰
1545년 음력 3월 8일(양력 4월 28일) ~ 1598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향년 54세. 한성부 건천동(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1592년 당시
전라좌수사(전라도 왼쪽 바다를 맡은 수군 사령관). 1591년에 부임했습니다.
사천해전에서
이억기의 함대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출항했습니다. 물이 빠진 것을 보고 물러나는 척해 상대를 바깥 바다로 끌어냈고, 물이 차오르자 거북선을 앞세워 돌격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까지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 뒤
이틀 뒤 당포, 엿새 뒤 당항포로 이어지는 2차 출전을 지휘했습니다. 그해 7월 한산도에서 크게 이겨 남해의 바닷길을 장악했습니다. 어깨의 상처는 오래 낫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순신」 · 디지털아산문화대전 「이순신」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이순신 1545~1598」 · 국가기록원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천해전」 · 난중일기 임진년 5월 29일 조

나대용

생몰
1556년 ~ 1612년. 향년 57세. 나주(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592년 당시
이순신의 막하 군관. 1591년에 전라좌수사 이순신 아래로 들어가 병선을 연구했고 거북선 건조에 참여했습니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과 같은 날 탄환에 맞아 부상했습니다. 난중일기 그날 일기에 이름이 그대로 나옵니다(“軍官羅大用中丸”).
그 뒤
한산도해전에서 다시 부상했고, 명량·노량해전에도 참전했습니다. 1612년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가와 묘소가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주의
나대용을 “거북선 설계자”라고 소개하는 글이 흔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건조에 참여”라고만 적습니다. 이 페이지도 그 표현을 따랐습니다.

전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대용」 · 디지털여수문화대전 「나대용」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나대용생가및묘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천해전」 · 난중일기 임진년 5월 29일 조

덧붙임

이 전투에는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노를 저은 격군, 활과 총통을 쏜 사부, 거북선을 만든 목수들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상대편 지휘관의 이름도 1급·2급 사료에는 적혀 있지 않아 이 페이지에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1413 ~ 2026

07연표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 조선 초부터 지금까지를 한 줄로 이어 놓았습니다. 굵게 표시한 것은 사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598년까지의 날짜는 음력입니다. 사천해전의 음력 5월 29일이 지금 달력으로 7월 8일입니다.

    확인한 것과 확인하지 못한 것

    08자료 출처

    이 페이지의 서술은 아래 자료에 근거합니다. 사진은 이용 조건을 확인한 것만 썼고, 표기 문안은 제공처가 요구하는 대로 옮겼습니다.

    사진과 영상

    이 페이지의 모든 사진은 이 사이트에 내려받아 함께 배포합니다. 원본 서버로 나가는 요청은 없습니다. 유튜브 영상 세 편만 재생 버튼을 누른 뒤 youtube-nocookie.com 으로 나갑니다. 도해 세 개(1592년 해전 위치·사천해전 전개도·대방진굴항 구조)는 이 페이지에서 직접 만든 그림입니다. 사진은 모두 원본을 웹에서 빨리 열리도록 크기를 줄였고, 공유 그림 한 장은 1200×630으로 잘랐습니다. 그 밖에 내용을 손댄 것은 없습니다.

    • 사천 앞바다(첫 화면) — 사진: GNUErkin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 원본
    • 거북선 재현선 옆모습(공유 그림·4절 배너) — 사진: Thu_Reyn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원본
    • 『이충무공전서』 거북선 도설 — 사진: PHGCOM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원본
    • 『이충무공전서』 지면(대영박물관 소장본) — 사진: PHGCOM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원본
    • 『임진장초』 — 문화재청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원본
    • 복원 거북선 용머리 · 덮개 쇠송곳 — 사진: Steve46814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용머리 · 쇠송곳
    • 거북선 재현선 안쪽(통영항) — 사진: Junho Jung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원본
    • 해군사관학교 복원 거북선 — 사진: hyolee2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 원본
    • 사천 선진리성 — 사진: 문화재청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원 공공누리 제1유형) · 원본
    • 삼천포대교 — 사진: Glabb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원본
    • 이순신 수결(원문 상자의 작은 장식) — 이순신 수결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원본
    • 영상 「조선의 운명을 바꾼 거북선」 — 영상: 국가유산채널(국가유산청) / 유튜브
    • 영상 「역사가 살아 숨쉬는 대방진굴항」·「거북선체험마을 둘러보기」 — 영상: 사천TV(사천시) / 유튜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사천 해전도」·「이충무공전서 거북선 도설 전문」·「난중일기 임진일기」, 국립해양유산연구소의 목포 거북선 사진(한석홍 촬영), 한국관광공사의 대방진굴항 사진은 공공누리 포털에서 회원으로 로그인해야 내려받을 수 있어 이 페이지에 싣지 못했습니다. 링크로만 안내합니다.

    1급 — 정부·공공기관 원출처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거북선 최초 출전 7월 8일 ‘방위산업의 날’로 제정」 korea.kr
    • 방위사업청 보도자료 dapa.go.kr
    • 국가유산청 국립해양유산연구소 보도자료(거북선 학술복원 보고서, 2026-06-30) khs.go.kr
    • 국가유산청 보도자료 「이순신 장군의 장계로 살펴보는 임진왜란의 그 날」 cha.go.kr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사천 대방진 굴항」 heritage.go.kr · 「사천선진리성」 heritage.go.kr · 「나대용생가및묘소」 heritage.go.kr
    • 국가기록원 「기념일과 기록 —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 archives.go.kr
    • 국가유산청 현충사관리소 유물안내 hcs.khs.go.kr
    •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 1일 · 선조 25년 6월 1일

    3급 — 지자체·공공 관광 · 4급 — 언론 · 학술

    원문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

    • 난중일기 임진년 1592년 2월 8일 · 3월 27일 · 4월 12일 · 5월 29일 조
    • 이순신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1592년 음력 6월 14일) — 『임진장초』 및 『이충무공전서』 권2~4 수록
    • 태종실록 태종 13년(1413) · 태종 15년(1415) 귀선 기사
    • 『이충무공전서』(1795) 권수 귀선도설
    • 이순신이 유성룡에게 보낸 서간(부상 후유증 서술)
    • 이분 「행록」, 신경준 『여암전서』, 이덕홍 『간재집』

    위 자료들은 백과사전과 기관 해설이 인용한 것을 옮긴 것이며, 원문 데이터베이스에서 직접 대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페이지의 인용문에는 모두 “전합니다” 또는 “통용 번역문” 표시를 두었습니다.